Saturday, October 10, 2015

내가 느낀 KAIST와 서울대의 차이


이공계 교수라면 KAIST에 대해서 대부분 잘 알리라고 본다. 그런데 KAIST에 해양학과가 없기 때문에 나는 KAIST를 갈 일도 없었고 그동안 잘 몰랐다.

내가 처음 KAIST에 간 것은 몇년 전 ICISTS란 회의에 연사로 초청받았을 때이다. ICISTS는 학부 학생들이 주관이 되어 만든 국제 학술 대회다.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다. 학부생들이 만든 대회가 얼마나 제대로 운영될까 싶었다. 대부분 학술대회는 대학원생이 되어서 지도교수님이 경비를 대주는 경우 참여한다. 하지만 학부생들의 경우 자비로 와야할텐데 정말 이런 대회가 가능할까 싶었다.

하지만 뜻밖이었다. 먼 외국에서조차 자기 돈을 내고 일주일 간을 서울도 아닌 대전에 머물면서 회의에 참가하러 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하다보니 그 뜻이 가상해 유명한 외국 강사들도 돈을 안 받고 pro bono로 와서 강연을 해 주었다. 진짜 교수님들이 뒤에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학부 학생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돌아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참여했을 때가 아마 7년째였던 것 같다. 한순간에 이 정도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지는 않는다.

학부생 주관 행사에 감명을 받은 나는 이런 것을 서울대생들도 해보면 어떨까 해서 한 간부 여학생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 학생은 "교수님. 서울대 학생들은 이런 거 절대로 못해요." 라고 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KAIST는 학생들이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1년 전부터 매일 늦을 때는 새벽까지 함께 토론하고 일을 하나하나씩 처리한다는 것이다. 서울대생들은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가기 때문에 절대로 이렇게 세심한 준비와 팀웍으로 이루어지는 일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학생의 말을 듣는 순간 내가 겪었던 서울대 학부시절이 생각났다. 대학이라고 들어왔는데 전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도 몰랐고 또 아무도 이끌어주지 않았다. KAIST는 학교 규모가 서울대에 비해 작고 또 비슷한 전공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 일이 덜하겠지만 인문학부터 예술 분야까지 거의 모든 학문 분야가 총망라된 서울대의 경우 학생이 방향과 정체성을 잃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이런 자유방임적 환경도 나름 장점이 있다. 길이 없는 망망대해에서 문제를 찾고 스스로 해결하는 개인적 능력이 발달하게 되는 것 같다. 알다시피 세상의 많은 문제가 교과서식 정답이 없고 스스로 찾아가고 해결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실 돌이켜보면 이런 점이 내 인생에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효율성 못지않게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당시 나는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겸무교수로도 있었다. 내가 아는 몇몇 자유전공학부생들에게ICISTS를 이야기해주며 한번 이런 것을 해보자고 했다. 스폰서는 내가 어떻게든 찾아볼테니. 그리고 KAIST학생들과의 만남도 주선했다. 그런데 역시 이렇게 고도의 조직과 결집이 필요한 일에서는 서울대 학생들이 잘할 수 없었다.

입시철에 서울대와 KAIST 중 어디를 갈까 고민하는 학생들에게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내가 본 두 대학의 차이를 적어보았다.



Friday, October 9, 2015

계산과학의 역사 1 (그리스인들의 의심,Greek suspicion)


이번 학기(2015년 2학기) 계산과학의 기초와 역사라는 과목을 처음으로 개설하여 가르치고 있다. 수학의 역사를 뒤돌아보니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그리스 사람들이 가졌던 일종의 편견이었다. 이 편견 때문에 1600년대에 데카르트(Descartes)에 이르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숫자(number)와 도형(geometry)를 별개로 생각하였다. 참고로 데카르트가 좌표라는 개념을 도입한 후에야 사람들이 숫자가 곧 도형의 길이나 크기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기하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a^2+b^2=c^2이라는 숫자의 개념이 아니라 직각이라는 각도를 만들려면 삼각형 변의 길이가 3:4:5라는 비율이 되어야 한다는 기하학적 관점에서 이해했다. 특히 그들은 무한의 개념을 아주 싫어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 무한대로 간다던가 어떤 값이 무한히 0에 수렴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무한이라는 것이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언가의 착오와 착각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숫자도 자연수와 정수만을 인정했다. 나눗셈을 하면 딱 떨어지지 않는데 유리수(rational number)의 경우 두 숫자의 나눔(예를 들어, 3.333...은 10/3)으로 표현할 수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유리수의 존재와 지위는 인정하였다.

문제는 무리수(irrational number)였다. 그들은 곧 논란에 휩싸였다. 알다시피 두 변의 길이가 1인 직각삼각형의 경우 나머지변의 길이가 피타고라스 정리에 의해 2의 제곱근(square root of 2)이다. 또 2의 제곱근은 무한히 간다.   sqrt(2)=1.4142135623...

 

그들은 '어떻게 위의 그림처럼 눈으로 볼 때 이미 정해진 길이(segment)가 계속 무한히 갈 수 있겠는가'라고 의심했다. 그러니까 도형상으로는 고정되어 있는데 그것이 숫자로 표현하고자 할 때 무한히 간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의 수학은 정말 찬란하고 여러가지 좋은 지적 유산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놈의 숫자와 도형에 관한 논란 때문에 더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무한에 대한 논란은 뉴턴이 미분방정식을 통해 자연을 설명하면서 종결되었다. 미분방정식의 핵심 개념이 무한(infinite/infinitesimal)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오늘날 반복적인 학습의 결과로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수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아직도 이 문제는 결론이 난 게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어쩌면 그리스인들의 생각이 정말 얼토당토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무한히 큰 것(infinite)과 무한히 작은 것(infinitesimal)한 것을 이해하는지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Saturday, October 3, 2015

행렬 교육(My first experience with matrix)


내가 행렬(matrix)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러니까 79년으로 기억된다. 행렬은 수학에서 1차 연립방정식을 효과적으로 풀기 위해 배우는 것인데 그때는 컴퓨터가 없어 아무도 이것을 왜 배우는지 몰랐다.

x, y, z 3개의 미지수가 있다면 그냥 손으로 풀면 되지 왜 굳이 이렇게 꼬아서 생각하는지 궁금했고 누구에게 물어봐도 시원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속으로 예비고사에 수학 만점자들이 너무 많이 나오니까 일부러 퀴즈 같은 것을  만들어 만점자를 줄이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 당시는 계산과학은 커녕 컴퓨터도 보급이 안 된 시절이라 몇몇 수학과 교수님들 아니고는 행렬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행렬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선형대수(linear algebra)라는 과목으로 다시 배웠는데 그 과목을 가르치던 강사도 잘 몰랐던 것 같다. 정말 왜 이렇게 쓸데없는 어린아이 장난같은 과목을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 가르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행렬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은 대학원에 들어가서 그것도 미국 대학원에 가서 소위 연구라는 것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과학은 관측과 실험이다. 우리는 새로운 관측을 늘 하는데 그것은 결국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고 주로 컴퓨터 상에서 행렬을 계산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그러니까 행렬은 어쩌면 내가 알아야 할 과목들 가운데 가장 연구와 밀접했던 과목이었던 것이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를 5-6년뒤에야 그것도 외국에 가서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이다.

많은 대학생들이 왜 선형대수를 배우는가 할 것이다. 맞다. 선형대수는 연구가 본격화되는 대학원에 가서야 사용하게 된다. 만약 계산과학 연합전공을 들어온다면 좀 일찍 사용하게 되겠지만. 대학교육은 그래서 calculus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선형대수를 배우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요즘 학생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쪽만 하려고 한다.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택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인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50대에 이른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때로는 어두운 터널을 숨을 참고 끝에 작은 불빛만 보고 달려 가듯이 다소 무모해보이지만 이해 안가고 힘든 것도 견디는 참을성이 필요하다. 스티브 잡스도 나와 같은 말을 했다. 할 때는 왜 하는지 모르지만 지나고 나면 모든 점들이 연결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고.